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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와주세법

by 냥대장님 2026. 6. 4.

전통주 기준의 아이러니 (전통주 기준, 주세법, 지역특산주)

보드카와 사케는 전통주가 될 수 있는데, 막걸리와 소주는 전통주가 아닌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저도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마트에서 전통주 코너를 훑다가 문득 "이게 왜 전통주지?"라는 생각이 드는 술이 있었고,
반대로 "이건 왜 전통주가 아니지?"라는 술도 있었습니다.

 

 

출처: 구글이미지

전통주 기준, 생각보다 훨씬 이상합니다

전통주는 주세법상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식품명인이나 무형문화재가 만드는 민속주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지역특산주 면허를 통해 전통주로 인정받습니다.
여기서 지역특산주란, 양조장이 위치한 지역 또는 행정구역상 인접한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주원료로 사용해야 인정되는 면허 체계를 말합니다.

문제는 이 '인접 지역'이라는 조건이 생각보다 훨씬 촘촘하게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경기도 용인의 양조장이 여주 쌀로 전통 방식의 소주를 만들어도,
두 지역이 행정구역상 맞닿아 있지 않으면 전통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차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인데도 말입니다. 반면 외국산 증류주인 진(Gin)을 만들더라도
원료만 인근 지역 농산물이면 전통주로 등록이 가능합니다. 진이란 주니퍼베리를
주요 향미 원료로 사용하는 서양 증류주입니다. 한국의 소주나 막걸리보다 훨씬 덜
'한국적'인 술인데도 조건만 맞으면 전통주 혜택을 받는 구조입니다.

제가 직접 마트에서 확인해봤는데, 누가 봐도 전통주처럼 생긴 막걸리가 전통주 표시가 없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원소주 같은 브랜드는 전통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원료와 제조 방식, 문화적 맥락이 아니라 '어디 농산물을 썼느냐'만으로 전통주 여부가 결정된다는
사실이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현행 규정의 문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와인, 보드카, 사케도 지역 농산물 조건만 충족하면 전통주로 인정됨
  • 반면 전통 방식의 소주나 막걸리도 인접 지역 원료 조건을 못 맞추면 탈락
  • 상위 3가지 원료가 모두 인근 지역 농산물이어야 한다는 주원료 기준이 존재
  • 제조 방식이나 문화적 전통성은 판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음

주세법의 높은 세율이 품질까지 깎아내립니다

전통주로 인정받으면 세금 감면과 인터넷 직접 판매라는 두 가지의 엄청난 혜택이 주어집니다.
전통주 세금 감면이란 일반 주류에 부과되는 주세보다 낮은 세율을 적용받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것만 보면 꽤 매력적인 혜택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혜택이 전통주의 가격 경쟁력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준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마트에서 전통주 코너와 수입주류 코너를 번갈아 비교해봤는데,
동일 용량 기준으로 일본(니혼슈) 사케나 수입 소주와 가격이 엇비슷하거나
오히려 국내 전통주가 더 비싼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풍미 면에서는 오히려 수입 제품이 나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유가 뭘까 싶어서 생각해보니, 한국의 주세 체계 자체가 워낙 세율이 높다 보니
전통주 감면 혜택을 받아도 출발점 자체가 높은 겁니다. 종가세 방식, 즉
술의 출고 가격에 비례해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에서는 고품질 술일수록 세금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여기서 종가세란 상품의 가격을 기준으로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부과하는 방식입니다.
결국 양조장 입장에서는 원가를 아끼기 위해 고급 원료나 장기 숙성을 포기하고,
당도를 끌어올려 '맛있어 보이는' 술을 만드는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저도 마시다가 결국 단맛이 없는 술로 마무리를 하게 되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국내 전통주가 단맛만 강하고 풍미나 Finish(술을 마신 후 입안에 남는 여운)가 빈약하다는 인상을 자주 받습니다.
관세와 교육세까지 얹혀서 들여오는 수입 사케나 와인이 가격 대비 완성도에서 앞서는 경우가 많다는 게 솔직한 감상입니다.
이건 개별 양조장의 실력 문제라기보다 구조적인 환경의 문제로 보입니다.

전통주 산업 규모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전통주 출고량은 최근 몇 년 사이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젊은 소비층을 중심으로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출처: 농림축산식품부).
그런데 이 성장세가 제도의 뒷받침 없이 소비자 트렌드에만 의존하고 있다면,
개인적으로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지역특산주 규제 완화, 어디까지가 맞는 선일까요

업계에서는 지역특산주의 주원료 기준 완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현행 규정상 술에 들어가는 원료 함량 상위 3가지가 모두 인근 지역 농산물이어야 하는데,
이 조건이 레시피 다양성을 심각하게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충청도 양조장에서 귤막걸리를 만들고 싶어도 주변 농가에 귤이 재배되지 않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실제로 발생합니다.

2021년 9월에 농림부는 인접 지역 외 원료를 5% 소량 허용하는 방향으로 주원료 기준을 완화하는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법 개정이 지연되면서 여전히 현장에서는 기존 규제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출처: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저는 국산 농산물 사용이라는 기본 취지는 지키되, 지역 제한은 어느 정도 풀어주는 방향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국 어디의 농산물이든 국내산이라면 농업 기반 지원이라는 본래 목적은 충족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촘촘한 지역 제한이 제품 다양성을 막고,
결국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전통주의 스펙트럼을 좁히는 역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물론 "지역 특산주는 그 지역의 특성을 담아야 한다"는 반론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현재 구조처럼 보드카와 사케는 들어오고 막걸리는 밀려나는 상황이라면,
그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제도의 취지와 현실이 따로 놀고 있는 겁니다.

결국 지금의 전통주 기준은 '무엇이 한국적인 술인가'가 아니라 '어느 지역 농산물을 썼는가'만을 묻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전통주 산업이 성장세를 유지하더라도 품질과 다양성 면에서
한계에 부딪힐 거라고 봅니다. 주세 체계 개편과 지역특산주 규제 완화, 두 가지가 함께 가야
실질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요. 다음에 마트에서 전통주를 고를 때,
뒷면의 원산지 표기를 한번 유심히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보입니다.